경제학을 전공하려는 j양에게

 
정운영(경제학자)
                                                              
J양에게!

"중국에 대해 기행문을 쓰려거든 그곳에 도착한 지 사흘 이내에 쓰시오." 라는 어느 서양 사람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흘이 지나면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문물과 조금씩 친숙해지면, 오히려 점점 더 당황하게 되어, 마침내는 붓조차 들지 못한 채 그 시도를 포기하게 되는 경우를 염려해서 일러 준 말이겠지요. J양이 잡지사로 보낸 편지를 전해 주면서 편집자는 나에게 '가장 자상하고 가장 친절한' - 말하자면 최상급의 형용사가 두 번이나 반복되는 - 회답을 부탁했지만, 아무래도 이 편지가 수신인을 잘못 짚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편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건대 J양은 아마 대학 입시를 앞둔 학생으로서 경제학이란 그 '삭막한' 느낌의 학문을 - 실제로 토마스 카알라일은 "경제학은 우울한(dismal) 학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 전공으로 선택해도 좋은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생이라는 나무는 그것을 가꾸는 과정의 인고(忍苦)가 그 열매를 따는 순간의 희열보다 더 소중한 법이니, 지금의 고민에서 쉽게 도피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과 적극적으로 대결하십시오. 내용은 다르나 내게도 지금 그와 비슷한 고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경제학을 하나의 '직업'으로 삼고 있는 나로서는 예컨대 한 권의 소설책을 덮으면서 던질 수 있는 '재미있다'거나 '지루하다'라는 식의 즉흥적인 감상을 그대로 경제학에 옮기는 일이 결코 용이하지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중국에 대해 기행문을 써야 할 한 서양인의 당혹과 곤란이 '잘못된 수신인'에게 하나의 현실로서 다가선 셈입니다.

  경제학이라는 말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대상은 아마 '밥'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밥―그것이 빵이나 스파게티라도 마찬가지입니다만―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 경제학입니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라는 철학자는 "인간이란 요컨대 먹는 존재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만, 실상 이 지극히 평범한 발견이야말로 경제학이 성립하는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블라디미르 두진체프의 소설 제목은 아주 지당하고 매력적인 말씀이나, "밥 없이 살 수 있는 녀석이 있으면 나서 보라"는 투박한 항의 또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이미 짐작했으리라 믿으나 밥은 그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한 보따리의 소비재일 수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밥은 한 사회의 발전과 쇠퇴를 규정하는 최초의 요인입니다. 따라서 그 밥을 어떻게 만들고 또 어떻게 나누느냐는 방식에 따라 그 사회의 문화가 형성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밥을 만드는 행위를 경제학에서는 '생산'이라고 합니다. 이 생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토지나 천연 자원과 같은 '노동도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일정한 조직과 통제 아래서 이들 생산수단 (노동대상과 노동도구)을 실제로 사용하는 '노동력'의 역할입니다. 이렇게 생산의 원천을 노동이라 할 때, 경제학은 "태초에 노동이 있었으니 거기서 생산이 비롯되었느니라."고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토지와 같은 노동대상은 자연에 의해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인간의 노동력과 무관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자연에는 인간의 노동이 부가되어야만 그것이 경제적 의미를 가집니다. 냉장고 속의 작은 얼음 한 조각에는 신경을 쓰면서도 북극의 빙산에 무관심한―적어도 경제적으로는―이유는 그 자연의 결정에 인간의 노동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본이라고 부르는 생산 설비와 같은 노동 도구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이전에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만들어 낸 노동의 집적이며 그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노동력은 토지나 자본에 선행하는 생산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생산의 주요 요소는 자연, 자본, 노동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노동대상, 노동도구, 노동력이며 그 중에서도 노동력이 가장 본원적인 요소라고 고쳐 말해야 됩니다.

  나는 위에서 밥을 어떻게 생산하느냐는 문제가 곧 그 사회의 문화적 형태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J양이 써 보낸 대로 경제학이란 요컨대 "한사람의 위대한 시인 보다 한 개의 발전소 건설을 더 소중하게 여기지나 않는지요." 라는 우려에 대해 얘기해보지요. 인간이 처음으로 경제생활을 시작하면서 노동력은, 구체적으로 그 노동력을 지니고 노동하는 사람은 노동대상과 노동도구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사유 재산이란 개념이 도입되면서 노동력은 먼저 노동대상을 잃게 됩니다. 예컨대 힘세고 욕심 많은 어느 한 사람이 자연이 하사한 광활한 토지에 사유의 울타리를 둘러치면서부터, 다른 사람들은 여태까지 함께 열매를 거두던 땅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또 지금까지 같이 고기를 잡던 강에 다가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회가 점점 더 발전하여 자본주의 단계로 들어오면 노동력은 다시 노동도구와 분리됩니다. 현대의 어떤 노동자도 자기가 일할 공장을 스스로 짓거나 자기가 사용할 기계를 스스로 지고 일터로 가지는 않습니다. 경제학이란 '프리즘'을 통해 볼 때 인류의 역사란 한마디로 인간의 노동에 의해 생산이 되풀이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노동의 주체인 인간은 자연(노동대상)이나 자본(노동도구)을 차례로 잃게 됩니다. 주인이어야 할 노동력이, 즉 인간이 오히려 그 도구에 예속되는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소외'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현대의 경제학이 이 소외의 문제를 '대단히 소홀하게' 다루는 것은 사실이고, 바로 그런 점에서 크게 비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경제학이 이 소외로부터의 인간 해방이란 그 본연의 사명을 끝끝내 포기할 수는 없기에, 아마 멀지 않은 장래에 경제학은 다시 J양이 걱정하는 그 시인에게 진정으로 용기 있는 역할을, 주인의 자리를 빼앗은 노예를 고발하고 노예가 된 주인을 분발하도록 만드는 힘찬 노래의 제작을 요청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미 만들어 놓은 밥을 어떻게 나누느냐는 문제, 즉 '분배'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나눈다는 행위는 그에 앞서 각기 이해가 대립되는 집단을 상정하게 만듭니다. 만약 서로 많이 가지려고 경쟁하지 않고, 서로 적게 가지려고 노력한다면 경제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이해 대립의 집단을 경제학에서는 '계급'이라고 부릅니다. 예컨대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가 생산한 결과를 귀족이 채찍을 휘둘러 빼앗았으며, 중세 사회에서는 농노에게 빌려 준 토지의 대가라는 명분으로 영주가 지대를 걷었으며, 현대 사회에서 노동자는 생산물의 일부를 임금으로 받고 나머지는 자본가가 이윤으로 차지합니다. 계급이란 이렇게 밥의 생산과 분배에 참여하는 사람과 사람 즉 노예와 귀족, 농노와 영주,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사실상 노동대상과 노동도구를 차지한 집단과 노동력만을 지닌 집단의 갈등 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 사회가 존속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은 투입보다 산출이 커야 한다는 단순한 산술에 의거하는데, 이 산출과 투입의 차액을 잉여라고 부릅니다. 만약 누가 100원을 비용으로 들여(투입) 120원을 수입으로 얻었다면(산출), 그는 이 사업에서 20원의 잉여를 낸 셈이 됩니다. 그런데 이 잉여를 귀족의 피라미드를 만드는 데에 탕진하고, 봉건제 사회에서는 농노로부터 수취한 지대를 영주는 고딕 사원을 세우는 일에 낭비해 버렸습니다.

  물론 나는 이 이윤이라는 단어가 매우 건조한 느낌과 황폐한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던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윤이 때때로 아주 고약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도 모르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 말은 J양 나이의 세대가 평가하는 사치 서열에서는, 예컨대 삶이니 사랑이니 혹은 휴머니즘이니 하는 개념들보다 훨씬 아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 J양이 사회의 정신 건강을 위해 아주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있는 미술관의 건립도 사실은 두부 공장의 건설과 마찬가지로 이 잉여가 경제 발전을 규정하는 가장 주요한 요인이고, 또한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그 사회의 문화 형태까지도 결정한다는 설득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그 잉여의 생산과 분배가 전혀 정의롭지 못한 관계와 방법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밥을 만들고 나누는 가장 구체적인 현상에서 시작하여 그 밥을 만들고 나누는 사람들의 관계로 관심을 돌릴 때, 경제학은 '밥과 사람의 관계'를 따지는 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거기에 내재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밝히는 학문으로 그 본연의 사명을 회복하게 됩니다.

  바로 그 사람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현대경제학이 표상하고 있는 '경제인(homoeconomicus)'또한 그렇게 애착이 가는 인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온통 도시를 압도하는 그 육중한 건물 안에서 하루 종일 자신의 머리를 컴퓨터의 단말기처럼 증권 시세표로 꽉 채우고 있는 비정한 표정의 금융인이나, 혹은 "하늘의 별을 헤아리기보다는 주머니 속의 화폐를 셈하기에 바쁜" 메마른 심성의 기업가에서 "한줌의 매력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J양의 지적을 굳이 탓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경제학이 그토록 약삭빠르기만 해서 항상 현실에 안주하거나 주변과의 타협 속에 연명해 온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경제학은 중세의 봉건 사회를 지배해 온 자연법사상에 대한 처절한 항거에서 싹텄다는 사실이나 혹은 마르크스 이래의 정치경제학이 자본주의 제도에 내재된 온갖 모순의 극복을 위해 여전히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다는 사정을 기억해두십시오.

  이제 그 경제학이 지닌 현실 개혁의 자세랄까 혹은 장래의 각오이랄까에 관해 얘기해 보도록 하지요.  이 대목에서 내 개인의 기억을 하나 섞는 것을 양해하십시오, 벌써 한 20여 년 전, 그러니까 대학에 입학해서 첫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때의 일입니다. 경제학이 얼마나 '훌륭한' 학문인가에 대해 추호의 의문이 없도록 처음부터 신입생의 머리를 철저하게 훈련시켜야 할 '중대한' 사명을 띠고 우리 앞에 나선 한 선배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엉뚱하게도 그것은 인류의 진보를 가져온 세 개의 사과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우선 아담이 먹었다는 창세기의 사과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계명을 거역하고 자유 의지를 선택하게 한 최초의 상징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뉴턴이 보았다는 사과는 자연의 공포로부터 인간이 지식과 이성의 독립을 선언한 찬란한 기록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윌리엄 텔이 쏜 사과는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인간의 압제를 전복하고 자유와 사랑을 실현하게 만든 위대한 승리의 표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얘기가 그 선배의 창작인지 아니면 타인의 작품을 도용한 (?) 것인지를 알 수 없으나. 그 내용은 확실히 산뜻한 재치 못지않게 상당한 설득력을 지나고 있습니다. 요컨대 이 아담의 사과, 뉴턴의 사과 그리고 텔의 사과를 거치면서 인간은 차례로 신과 자연과 인간의 폭력으로부터 그 '자유의 영역'을 확대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사과에 대해서는 철학의 영역에서 그 시비가 가려지고, 뉴턴의 사과가 자연과학 분야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면,  텔의 사과는 필경 사회과학에서 관심이 대상이 되겠지요. 사실 18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소위 계몽사상은 바로 인간의 해방에 대한 최초의 자각이랄 수 있는데, 그 중요한 계기는 경제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의 발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니까 1776년 아담 스미드의 "국부론" 의 출판으로부터 현재까지 경제학 200여 년의 역사는 실상 밥을 만들고 밥을 나누는 자유를 독점하려는 집단과 그 독점을 저지하려는 집단이 벌인 처절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자연법 질서에 대항해 1770년대 '고전과 경제학' 이 태동되었습니다. 그 후 1870년대에 들어와 이 고전파 경제학이 지나치게 급진적이란 이유로 '신고전파 경제학'이 이의를 제기했고, 반대로 그것이 너무 보수적이란 이유로 '마르크스 경제학'이 도전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신고전파 경제학이 지닌 이론과 정책의 오류에 대한 반동으로 1930년대에 '케인즈 경제학'이 성립되었습니다.

  나는 이들 여러 이론이 실현하려고 애썼던 자유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 쓰지 않겠습니다. 다만 새로운 주장이 예전의 생각을 계승하기보다는 거부한 면이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에, 새 이론이 옛 이론의 '발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과의 '대결'이란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경제학은 J양이 여러 차례 우려했듯이 현실에 자족하는 무기력한 학문이 아니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혁명하는' 학문이란 뜻입니다.

  위에서 나는 경제학이 밥과 사람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해명하는 학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만, 앞의 관계는 한 마디로 풍족한 밥에 대한 요구이고 뒤의 관계는 자유의 영역 확대에 대한 집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경제학을 통해서 '밥과 자유'라는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두 측면을 규명 할 수 있게 됩니다.

   J양!
  앨프리드 마셜은 경제학자들에게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함께 지니도록 당부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J양이 냉철한 지식(이론)과 열렬한 애정(실천)을 가지고 자신과 이웃이 밥을 얻고 자유를 찾는 일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면, 경제학을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마십시오. 결코 자상하지도 못하고 또 친절하지도 않은 이 회신이 J양이 '미래'를 선택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by Tatonment | 2007/09/16 12:40 | 배우고 | 트랙백 | 덧글(0)

『조선 왕 독살사건』, 이덕일 저


<조선 왕 독살사건> , 이덕일 지음, 다산초당

- 조선 왕 독살설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과 수수께끼











이덕일의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조선 선비 살해사건 -1,2』에 이어서 두번째다. 서점을 기웃거리기 좋아하는 나는 어느 날, 서점 한 켠에서 흥미로워 보이는 제목의 책들을 마주했다. 그게 『조선 왕 독살사건』이었다. 그 옆에는『조선 선비 살해사건』이 놓여져 있었다. 그 때는 『뿌리 깊은 나무』류의 소설들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기에 나는 위의 책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꼭 다음에 꼭 읽어봐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조선 선비 살해사건』이 서가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냅다 빌려와서 읽었다. 처음에 소설이라고 생각했던 이 책은 정작 펴보니 조선사 선비들에 관한 책이었다. 조선의 개국에 관여한 사대부에 대한 이야기부터해서 선조에 이르러 사림파가 정권을 잡기까지, 200여년에 이르는 시간동안 일어났었던 사건들을 선비들을 중심에 놓고 전개해나간다. 국사시간을 통해서 대략적인 사건들을 배우긴 했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료들을 참고해가며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매우 생생하기에 책 속으로 점점 빠져들게 만든다. 이렇게 한번 역사를 풀어내는 저자의 매력에 빠져들고 나니 다른 책들이 읽고 싶었고 마침 지난번에 점 찍어뒀었던『조선 왕 독살사건』이 반납되어길래 냉큼 빌려와서 하루종일 방안을 뒹굴며 읽어버렸다.

『조선 왕 독살사건』은 조선의 임금과 세자들 중 죽음과 관련하여 의혹이 있는 8명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책은 단순히 독살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비롯해 그 인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다양한 세력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즉, 각 인물에 대한 장은 그 시대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독살의혹에 시달리는 인물은 인종, 선조, 소현세자, 효종, 현종, 경종, 정종, 고종. 조선조 500년의 역사 중 중후반기의 대부분의 왕들이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조선이란 나라에 이렇게 많은 임금들이 독살설에 시달렸던 까닭을 후의 300년이 사대부의 "비정상적인 생명의 연장"때문이라고 말한다. 애초에 임진왜란을 통해서 사대부가 다스리는 조선의 국가 통치 체제는 종말을 맞이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했지만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생명이 연장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했으며 그것이 중 하나가 바로 "국왕 독살설 "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독살설이 "임진왜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독살설은 붕당의 영향력 강화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저자가 지목하는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의 한가지 공통점은 바로 그 "배후에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하며,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한다는"것이다. 즉, 비정상적으로 영향력이 커진 붕당의 존재는 임금을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로 만들며, 자신들의 집권을 위해 '임금을 갈아치운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도록 만들었다. 윤선도의 "지금 나라의 권력은 위의 임금에게 있지않고, 신하(송시열)에게 있습니다" 라는 상소는 당시 임금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조선이라는 '왕조' 국가에서 '왕'이 이렇게 취급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정치체제"였는지가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8명의 인물에 관한 이야기들 중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소현세자와 경종의 것이다. 소현세자의 경우는 아쉬움이 었고, 경종의 경우는 놀람이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첫째아들로 병자호란 당시 청에 봉림대군과 함께 끌려간 사람이다. 심양에서의 생활과 청의 명 정복후에 경험한 북경생활은, 조선이란 나라에서 성리학에 둘러싸여 곱게 자란 소현에게는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 생활을 통해 소현은 '힘'이라는 현실주의적인 세계관을 갖게 됐을 뿐만 아니라 서양문물들을 다양하게 접하게 됨으로써 시대상황에 부합하는 인물로 성장해나간다. 하지만 청에 의해서 소현세자에 의해 임금자리를 빼앗길 줄 알았던 인조는 소현을 견제하게 되고, 소현은 귀국 후 두달만에 병을 얻어 죽고 만다. 그 당시 무거운 병이 아니었던 학질을 죽음으로 몰고간 의관 이형익을 옹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자자리 역시도 소현의 아들이 아닌 소현의 동생인 봉림대군에게 넘긴 인조의 행동은 소현세자의 죽음에 의혹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인조가 야기한 이 문제는 단순하게 독살문제로 그친 것이 아니라 봉림대군(효종)과 그 뒤를 이은 현종의 시절 발생한 효종의 정통성 문제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이후 조선의 역사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시대 상황에 밝았던 군주 소현이 왕권을 얻었다면 이후 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됐을런지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경종을 매우 어리숙한 군주로 생각하고 있었다. 늘 장희빈의 그늘에 가려서 제대로 된 성정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특히 야사의 기록인 장희빈이 사약을 받을 때 경종의 하초를 잡아땡겨 몹씁병을 얻어 병을 앓다가 죽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알게된 경종의 면모는 매우 새로웠다. 경종의 아버지 숙종은 조선에서 힘이 강했던 왕 중 하나였다. 여러차례에 걸친 환국을 통해 얼마나 각 당들의 세력싸움이 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결국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을 떄 이들에게 고깝게 여겨지던 경종이 즉위한다. 노론은 연잉군(영조)을 점찍어 놓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경종은 바뀌어져야 할 왕이었다. 그래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그들은 경종에게 연잉군을 통한 대리청정을 요구하는 등 기세가 등등했다. 하지만 재위 2년을 맞게되는 1712년 경종은 이들을 모두 몰아내고 자신에게 우호적인 소론을 대거 요직에 배치하는 '대전환'을 이뤄냈고 이를 '신축환국'이라한다.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여러 옥사를 비롯한 조치를 통해 경종은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지만 갑작스레 병을 얻게되고, 경종의 병을 담당했던 연잉군(영조)은 어의들의 주장을 물리친 채 자의적으로 처방했으며 결국 경종을 얼마지나지 않아 승하한다. 이는 당시 권력을 잡아가던 남인과 소론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들은 영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경종의 독살의 복수를 외치며 일어난 이인좌의 난, 나주 벽서사건 당시 영조의 면전에서 신치운이 "당신이 선왕을 죽인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 사건을 보더라도 경종 독살설이 얼마나 이들에게 뿌리 깊었는지를 말해준다. 비록 제대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당시 당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려 한 경종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저자는 예송논쟁과 송시열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편견에 대해서도 공격한다. 조선조 사상 가장 쓸데없는 논의로 여겨지는 예송논쟁의 참된 의미와 북벌의 주창자로 완전히 잘못 받아들여지고 있는 송시열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인상 깊다. 간단하게 말해서 예송논쟁은 당시 당쟁에 있어 가장 중심적인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현종이 개입할 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이는 '효종의 정통성'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복을 얼마나 입는지가 뭐가 중요하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조선은 성리학을 중심이념으로 하는 나라였고, 특히 소현의 동생으로 즉위한 효종의 정당성 문제는 그의 아들인 현종의 기반까지 없애버릴 수 있는 문제다. 예송논쟁의 참된 문제점은 그 '예학'논쟁이 결국에는 사대부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 했다는데 있다. 예학은 각 신분의 역할을 규정하고 있으며기에 당시 자신들의 지위에 흔들림을 느낀 사대부는 예학을 중요시함으로써 시대상황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이권을 유지하려 했다.효종과 함께 북벌을 주장한 것으로 송시열은 전혀 북벌을 주장하지 않았다. 주자학에 심취해있던 그에게 명이 무너진 이상, 우리가 명을 이어받았다는 소중화사상을 믿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굳이 군비를 확장하여 청에게 전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 특히 사대부들은 효종의 강력한 군비확장을 비판했다. 사대부들은 '문인'들이었기 때문에 무인의 권리 향상이나 군사의 확장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으며, 그 반대의 표면적인 이유는 백성이 편안하게 해야한다는 안민론이었지만 사실상 자신들의 지위를 걱정한 것이었다. 북벌은 효종을 비롯한 소수세력의 주장이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사대부들의 자기모순적인 태도는 조선 후기 사회의 모순들을 심화시켜나간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시대상황의 변화에 어울리는 행동이 필요했지만 자신들의 이권을 내어놓지 못한채 조선은 점점 망국으로 흘러나갔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고 한다. 즉, '만약..이랬다면' 어떻게 됐을 것이라는 추측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독자의 입장에서 '만약'의 물음을 머릿속에 떠올리기 시작하는 순간 느낄 수 있는 짜릿함과 즐거움은 역사에 관련된 책을 읽을 때 빼놓을 수는 없다. '만약 소현세자가 임금이 됐다면...'같은 생각을 했을 때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이 얼마나 즐거운지 다시 한번 일깨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by Tatonment | 2007/04/04 15:02 | 읽고 | 트랙백 | 덧글(3)

산책

며칠 전, 방 안에만 박혀있는 내 자신이 한심해보여서 귀찮아하는 몸을 이끌고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내가 이렇게 고향에 내려와서 방 안에 처박혀있는건 군대문제가 복잡해지면서 어정쩡하게 시간이 한달정도 비어버렸기 때문. 계속 이렇게 놀고 먹고 있는 날 합리화했던 생각은 한달은 뭘하기도 애매하다란 것. 사실 중간중간에 서울 몇번 올라갔다와버리면 뭔가를 제대로 하기 힘들긴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합리화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있다. 좀만더 열성적으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면 뭔가 하나 제대로 해놓고 갈 수도 있었는데. 이 젊은 날의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렇게 처박혀 있다보니 뱃살도 늘어나는 것 같고, 군대가서 적응도 잘하지 못할까봐 걱정도 되고 해서 일부러라도 몸을 움직여야 된다는 압박이 느껴졌다. 그래서 간단하게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우리동네 위쪽에는 저수지가 하나 있다. 일제시대 때 만들었단 이야기도 있고, 해방후에 만들었단 이야기도 있지만 난 잘 모르겠다. 명절때 집에 내려와 근처 산소에 갔을 때 멀리서 바라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가본 적은 오래됐다. 처음에 거기까지 갈 생각은 없었지만 걷다보니 날씨도 좋고해서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여유롭게 집 근처를 산책해보기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아침 일찍나가고 밤 늦게 들어오는 것이 일상이 됐고, 그리고 대학교로 진학하며 고향에는 몇달에 한번씩 내려왔던 시간이 벌써 5년이 넘었다. 당연히 그 시간동안 이 동네를 제대로 돌아본 적이 없다. 여기는 내 기억 속에 여름밤이면 하늘에는 별이 가득하고, 땅과 하늘 사이에는 개구리 소리가 가득한 곳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그걸 만끽한 지는 너무 오래전이었다. 가끔씩 차소리와 에어컨소리로 시끄러운 서울의 여름날 밤이면, 생맥주 한잔과 어울리진 않지만 어린시절 고향의 여름날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개 잊고 지냈다.

벌써 개나리와 목련을 꽃을 맺고 있었다. 이전과 별 다를것이 없는 고향길을 거닐으며 괜시리 어린시절의 추억에 잠겼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많은 것들이 하나 둘 머리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아련하게, 또 다른 어떤 것은 아쉽게. 그렇게 하나 둘씩.

저수지를 지나 걷다보니 작은 절까지 발길이 닿았다. 조그마한 그 절은 커다란 나무가 파수꾼인마냥 입구를 지키고 서있었다. 그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은은한 풍경소리. 내 마음은 그 소리에 반응해 조금씩 편안해졌다. 그 때의 마음을 언어로 고스란히 옮기기가 힘들다. 이제까지 안 좋은 생각들은 모두 없애버리는 것처럼 밝고 청아했던 그 소리. 거기에 이끌리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절에서 생활하는 스님들이 매일 이런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니, 그 마음이 맑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한 시간 반 정도의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다.
어린 시절의 많은 추억들과 그 은은했던 풍경소리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채로.

by Tatonment | 2007/04/04 12:55 | 일상에서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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